87년/91년/2000년 투쟁을 통해 본 남한사회 전선체 운동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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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3-31 08:07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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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0대 해결해야할문제는 정권퇴진이라는 슬로건에 걸 맞는 해결해야할문제라 보기가 어려웠다. 진선체운동8 , 87년/91년/2000년 투쟁을 통해 본 남한사회 전선체 운동의 평가경영경제레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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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4월 26일 사건이 발생하자, 33개의 재야 市民단체와 야당의 발빠른 움직임 속에 바로 다음 날인 27일에 `故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이하:대책회의)가 결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4월의 정세는 4월 29일 전남대 박승희의 분신으로 5월 투쟁으로 폭발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투쟁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부터 탄압을 받는다.
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열사들의 분신을 보는 시각은 처음의 분위기와는 달리 점점 개인적인 일이라는 것으로 흘러갔고, 정권퇴진/민주정부 수립보다는 단순한 공안통치 분쇄로 투쟁의 각이 맞추어져 갔다. 김지하 시인의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외침과 박홍의 ’분신배후세력설‘, 유서대필의혹 등은 분신을 자살이 아닌 정권의 탄압에 의한 타살로서 규정하던 분위기를 반전시키게 된다
평가-왜 또 다시 급격하게 식어 버릴 수 밖에 없었나...
대책회의는 전국적으로 50만이 넘는 대중 동원을 경유하면서 ‘공안통치 분쇄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로 명칭을 변경하고 당면투쟁 10해결해야할문제 김정한, 『대중과 폭력-1991년 5월의 기억』, 이후, PP. 53~54.를 제시한다.
이러한 이유에는 당시의 야당세력이 광역의회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노태우 정권과의 관계를 주시하고 있었던 점이 크게 작용하였고, 사회운동세력 역시 비합단위들을 중심으로 대안적 공동체의 意見(의견)을 유인물들을 통해 제시하였지만, 그것이 크게 담론화 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각 부문운동의 goal(목표) 들을 취합·열거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었고, 스스로 민주정부 수립을 말하면서도 그 권력대안이기를 주저하고,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대안을 고민하는 않는 투쟁은 고립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정부의 ‘528 민심수습대책’을 경유하면서 또 다른 87년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87년/91년/2000년 투쟁을 통해 본 남한사회 전선체 운동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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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체운동8
설명
87년의 6월 민주항쟁, 7,8,9 노동자 대투쟁, 그리고 91년 5월 투쟁, 최근의 反신자유주의 투쟁으로 이어지는 남한 민중의 투쟁의 역사 속에서 어떠한 지점이 그 폭발적인 대중동원에도 불구하고 좀 더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로 이어지지 못했는가를 살펴본 리포트입니다.
3. 2001년, 상설적 공투체로서의 전국민중연대준비위원회가 …(To be continued )
87년의 6월 민주항쟁, 7,8,9 노동자 대투쟁, 그리고 91년 5월 투쟁, 최근의 反신자유주의 투쟁으로 이어지는 남한 민중의 투쟁의 역싸 속에서 어떠한 지점이 그 폭발적인 대중동원에도 불구하고 좀 더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로 이어지지 못했는가를 살펴본 리포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