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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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4-15 23:30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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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어머니의 간절한 요구에 따라 향시에 응시해서 특선으로 뽑혔다. 박은식의모든것 , 박은식인문사회레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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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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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朴殷植)
1859(철종 10)~1925. 조선 말기·일제강점기의 학자·언론인·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성칠(聖七), 호는 겸곡(謙谷)·백암(白巖). 황해도 황주 출생. 농촌 서당 훈장 용호(用浩)의 아들이다.
1882년에 상경해 서울에 머무는 동안 7월의 임오군란을 목격하고 시무책을 지어 국왕에 제출하였다. 그 해 11월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만민공동회에서는 문교부장급 간부로 활동하였다. 1898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해 회원이 되었다.
10세부터 17세까지 아버지의 서당에서 정통파 성리학과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다.
박은식에 대한 資料입니다.
국권을 잃은 후 중국(China)에 망명해 독립운동에 종사할 때에는 박기정(朴箕貞)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했고, 태백광노(太白狂奴) 또는 무치생(無恥生)의 별호를 쓰기도 하였다.
이름높은 성리학자로서 자신의 학문을 정립한 후인 1898년에 독립협회의 사상과 운동의 effect(영향) 을 받고 성리학과 위정척사사상에서 개화사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과거공부에 회의를 느껴 고향을 떠나 당시 황해도 일대에서 이름나 있던 안태훈(安泰勳 : 安重根의 아버지)과 교우하면서 문장을 겨루어 황해도의 양 신동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1898년 9월 남궁 억(南宮檍)·유근(柳瑾)·나수연(羅壽淵) 등이 ≪황성신문 皇城…(생략(省略))
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매우 실망해 낙향, 태천(泰川)의 큰 학자 박문일(朴文一)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박은식에 대한 자료입니다. 그 뒤 1888년부터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날 때까지 6년간 능참봉을 한 것이 관직생활의 전부였다. 이 시기에 박은식의 성리학은 높은 경지에 도달해 서북지방에서는 물론이요 중앙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후 전국을 답사하던 중 1880년(고종 17)에 경기도 광주 두릉(斗陵)에 사는 정약용(丁若鏞)의 제자인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을 찾아가서 정약용이 저술한 정법상(政法上)의 학문을 섭렵하면서 실사구시의 학풍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