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시조구태묘의 성립과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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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9-07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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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이왕은 초고의 장자 사반이 사위하였지만 어려서 정사를 볼 수 없었으므로 고이가 즉위하였다고 한다. 다만, {삼국사기}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그 개연성을 다소 찾아낼 수 있다아
먼저 {삼국사기}에서는 고이왕에 대해 초고왕의 [모제]라고 하였는데, 이를 동모제로 읽을 경우에는 그가 개루왕의 아들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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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가 백제사상의 실질적인 건국주였다고 하면 과연 어떤 인물을 지칭하는가 하는 데에 관심이 모아지는데, 구태를 고이왕에 비정하는 설이 가장 주목...
백제 시조구태묘의 성립과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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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가 백제사상의 실질적인 건국주였다고 하면 과연 어떤 인물을 지칭하는가 하는 데에 관심이 모아지는데, 구태를 고이왕에 비정하는 설이 가장 주목... , 백제 시조구태묘의 성립과 계승인문사회레포트 ,
구태가 백제사상의 실질적인 건국주였다고 하면 과연 어떤 인물을 지칭하는가 하는 데에 관심이 모아지는데, 구태를 고이왕에 비정하는 설이 가장 주목을 받아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구태를 고이왕에 연결시킬만한 직접적인 reference(자료)는 없다. 이러한 고이왕대의 지배체제는 매우 정치하게 갖추어져 있었던 듯이 보이기 때문에 그 신빙성에 마주향하여 는 많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삼국사기} 고이왕대의 기록상의 결점은 27년 이후에 집중되어 있는 체제정비 기사에서도 지적되었다. 우선 고이왕 27년의 6좌평 설치 기사는 {구당서} 백제전의 내용과 합치하고 있으며, 이어서 보이는 16관등 제정내용은 {주서} 백…(省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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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삼국유사}에서는 고이왕의 즉위는 사반(사비)이 즉위하였다가 폐위된 뒤에 이루어졌다고 하기도 하며, 사반이 돌아간 뒤에 즉위하였다는 이설도 있었다. 그러한 분식과 조작은 후대 백제인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개루왕이 죽은 해인 166년에 고이왕이 출생하였다 하더라도 286년 그의 사망시에는 무려 120세나 된다 이같은 일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기 문에 고이왕의 계보를 온조-초고계와는 다른 비류계라고 하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와는 달리 고이를 단지 온조의 방계로 보는 설도 있어 선뜻 어느 쪽을 취신해야 할지 의문이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볼 때 고이왕의 즉위는 정상적으로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닌 듯하며, 왕계도 온조의 직계가 아님을 인정할 수 있다아 분명한 것은 {삼국사기}에서 고이왕이 가계상 개루왕에 연결되는 것으로 분식되었으며, 기년도 어느 시기엔가 조작되었다는 것이다.